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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일보] “막대한 잠재력 있고 특별한 나라, 조국에 자부심 품으세요”

김창준 전 의원이 미국 대학에서 공부하다 한국으로 돌아와 군 복무 중인 공군15특수임무비행단 박범철(가운데) 병장·유병진 상병과 만나 자신의 성공 스토리를 들려주고 있다. 사진=이헌구 기자

김창준 전 의원이 미국 대학에서 공부하다 한국으로 돌아와 군 복무 중인 공군15특수임무비행단 박범철(가운데) 병장·유병진 상병과 만나 자신의 성공 스토리를 들려주고 있다. 사진=이헌구 기자

 

 

“제가 미래를 봤다고요? 아닙니다. 과거를 보고 (트럼프 당선을) 경험으로 알게 된 것이죠.”

김 전 의원은 트럼프 당선을 어떻게 맞혔는가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고 했다. 미국 주류층이 가장 원하는 인물이 트럼프였음을 경험을 통해 읽어냈다는 것이다. 그는 “오바마 전 대통령 재임 기간 백인들이 가지게 된 소외감과 상대적 박탈감이 표출된 것”이라며 “트럼프는 백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메시지를 던졌고, 결국 당선됐다”고 말했다. 

트럼프 시대, 한미동맹도 큰 변화를 맞이할 것이라는 전망에 대해 김 전 의원은 “미 공화당은 전통적인 친한파로 한미동맹에 대해 단 한 번도 의문(Question)을 가진 적 없다”며 “한국이 잘 대응한다면 (한미동맹에) 우려할 정도의 변화는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한, 미 의원 시절 사업가 트럼프와 만남이 있었다는 김 전 의원은 그의 캐릭터를 “직설적이고 반사적”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종말단계고고도지역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 관련 중국의 보복에 대해서는 “대국의 자세가 아니다”라며 “사드는 우리 것이 아니고 주한미군 것으로 방어를 위해 필요한 방어 무기”라고 못 박았다. 이어서 “중국의 보복은 큰 나라로서 어울리지 않는 너무도 속 좁은 행동”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김 전 의원은 “내가 운영하는 아카데미에서 한국 기업인이 ‘나라가 있어야 기업이 있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크게 감명받았다”며 “구글이 미국에 그런 인식을 하겠나? 한국인들도 결기를 가지고 이런 기업들을 적극 지원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편 김 전 의원은 “미·중 관계는 앞으로 악화할 가능성이 있다”며 “4월 초 예정된 미·중 정상회담에서 1순위 주제는 ‘세컨더리 보이콧(Secondary Boycott)’, 2순위는 ‘북한에 대한 지원 중단’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아울러 “올해 가을 중국 공산당 전당대회가 열리는데, 국가적 리더십을 인민에게 보이려는 중국 정부와 세컨더리 보이콧, 남중국해 등을 문제 삼는 미국 간 갈등이 빚어질 수 있다”며 “그러나 결국 중국이 압도적으로 강한 미국에 한발 물러나는 양상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현재 악화 양상을 보이는 한·일 관계에 대해서 그는 “핵 공격의 가해자와 피해자인 미·일은 우리보다 역사적 갈등이 훨씬 깊고 죽은 사람도 많지만, 오늘날 가장 긴밀한 우방국”이라며 “우리도 스스로 안전을 위해 일본과 갈등을 풀려는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김 전 의원은 북한의 도발 관련 “미국의 전략적 인내는 끝났고, 모든 옵션을 선택지에 올릴 것”이라며 “단, 미국은 한국 시민의 안전과 국제여론을 고려해 선제적 타격에는 극도로 신중할 것이며, 또 다른 형태의 군사적 훈련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미 대선을 앞두고 있던 지난해 10월, ‘트럼프 대통령에 대비하라’는 제목의 책이 출간됐다. 대다수 언론이 힐러리 클린턴 후보의 당선을 기정사실로 여겼던 시기였다. 투표 결과 미국의 선택은 트럼프였다. 미국인들의 속내를 정확히 꿰뚫어 본 저자는 김창준(78) 전 미 연방하원의원이다. 그는 1961년 맨손으로 미국에 건너가 한국계 최초로 캘리포니아주 연방하원의원에 당선돼 내리 3선을 지낸 인물이다. 지난 24일 김 전 의원을 만나기 위해 공군15특수임무비행단 소속 유학파 병사들과 함께 여의도 김창준미래한미재단으로 향했다. 김 전 의원은 트럼프 시대 한반도와 동북아 정세를 전망하고, 미 세인트존스대학교와 애리조나주립대에서 유학하다 한국으로 돌아와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박범철 병장과 유병진 상병을 격려하며 진심 어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박범철 병장(이하 박): 몇 살 때 미국으로 떠나셨나요?

“1961년 22살 때로 기억합니다. 겁 없이 혼자서 미국으로 떠났죠. 당시 한국은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북한이 우리보다 더 잘살 때였어요. 워낙 가난한 나라에서 왔기에, 어지간한 고생은 고생 같지도 않았어요. 식당에서 접시도 닦고…, 안 해본 일이 없어요. 캘리포니아 남가주대학(USC: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에 다니며 낮에는 토목 공부를, 밤에는 아르바이트를 했죠.”



-유병진 상병(이하 유): 어떻게 미국 정치무대에서 활약하게 되셨나요?

“대학 졸업 후 토목설계회사를 운영해 크게 성공했어요. 캘리포니아는 물이 부족해서 지하수에 많이 의지하는데, 관련 기술을 확보한 것이 큰 도움이 됐죠. 돈을 많이 벌었고, 백인 부자 동네에 집도 샀습니다. 정부 관련 일을 하다 보니 자연히 정부 관계자들과 친분도 생겼어요. 어느 날 당시 시장이 찾아와 뜻밖의 시 의원 제의를 했어요. 아마 한국계, 동양계가 이 지역의 시 의원이 된 것도 이때가 처음이었을 거예요. 이때부터 미국 정치판에 발을 들여놓게 됐죠.”

 


-박: 3선 의원을 지내셨죠? 어떻게 미국인들의 지지를 받으신 건가요?

“(첫 후보 등록 당시) 제 지지도는 단 3%에 불과했어요. 2000명이 모인 강당에서 모든 후보가 돌아가며 연설했던 날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눈앞에 있는 백인들을 향해 ‘난 보시다시피 동양인이다’라고 운을 뗐습니다. 그리고 당당히 말했어요. ‘여러분은 태어나면서 자동으로 미국 시민이 됐죠? 저는 10년 걸려 시민권을 얻어냈습니다. 당신과 나, 누가 더 애국자입니까?’ 그때 박수가 터져 나왔죠. 이 연설을 기폭제로 인지도가 크게 올랐어요. 당시 미 정치인들 가운데 엔지니어 출신이 거의 없었다는 것도 차별점이 됐습니다. 전 토목 기술자 출신으로 물 부족 해결, 인프라 개선 등 기술적 부분을 바탕으로 지역구에 꼭 필요한 문제에 대해 실질적인 방법을 제시했고, 이것이 많은 지지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유: 의원직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신 이유가 있나요?

“1990년대 노태우 대통령 초청으로 30년여 만에 처음으로 한국에 돌아왔어요. 달라진 서울이 얼마나 놀랍던지요. 63빌딩이 생겼고, 자동차가 쌩쌩 달리고 있더군요. 내가 떠났던 한국이 맞는지 눈을 의심했죠. 해외에서 목숨 걸고 일하는 한국인들의 역동적인 모습에 가슴이 뛰었어요. 그때 ‘아, 내가 한국사람이다’라는 자부심이 생겼어요. 물론 당시에는 한국에서 살겠다는 마음은 없었어요. 그러나 한국과 미국을 자주 오가면서 이곳이 내 고국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고, 작은 도움을 주고자 한국에 머무르게 됐습니다. 한국인들은 미국을 이론적으로만 알지 실체를 잘 몰라요. 미국 사회와 정치를 오래 경험한 사람으로서 한국을 돕고자 이곳에서 ‘김창준미래한미재단’과 ‘정경아카데미’ 운영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박: 다시 한국 국적을 찾으실 마음은 없나요?

“사실, 몇 년 동안 한국에서 살면서 한국사람 다 됐어요. 미국 국적을 유지하면서 불편한 부분도 많고요. 그러나 미국 역사상 미 국회의원이 국적을 포기한 사례는 없어요. 제가 만약 국적을 바꾸면, 이는 오히려 (미국의) 한국에 대한 인식을 나쁘게 만드는 계기가 될 겁니다. 미국 교포와 한인들의 사기를 저하하는 일이 될 수도 있어요. 트럼프 대통령 당선 이후 저에게 민간 외교관 역할을 해달라는 요청이 많습니다. 이제 고령이라 운신이 어렵고 한계는 있지만, 힘닿는 부분에서 연결고리 역할을 할 것입니다.”



-유: 한국계 미 의원이 더 많이 나와야 할 것 같습니다.

“안타깝게도 저 이후로 한국계 의원이 단 한 명도 배출되고 있지 않습니다. 원인은 한국계 후보가 거의 민주당으로 출마하기 때문이라 봅니다. 오히려 공화당으로서 백인 거주 지역에서 백인들과 경쟁해야 가능성이 있습니다. 제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죠. 중국계, 히스패닉 등은 모두 민주당 지역에서 싸울만한 각자의 표 텃밭이 있습니다. 반면, 코리아타운의 한인들은 장사만 거기서 하지 밤에는 다들 환경 좋은 백인들 부자 도시로 흩어집니다. 또한, 아시아계가 많은 지역이라고 한국계를 찍어주지 않습니다. 편한 곳을 찾지 말고 가장 어려워 보이는 곳에서 정면승부를 펼쳐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박: 마지막으로 한국 장병들과 청년들에게 조언을 부탁합니다.

“먼저, 두 사람 모두 나라를 지키려고 한국에 돌아왔다니 훌륭합니다. 저는 가장 가난했던 대한민국과 오늘의 대한민국을 모두 경험한 사람입니다. 저는 이것이 ‘발전’ 아닌 ‘기적’이라고 봅니다. 대한민국의 젊은이들 모두 이런 발전된 나라에 사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조국에 자부심을 품기 바랍니다. 저는 미 의원으로서 전 세계를 돌아본 사람입니다. 그런 제가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꼭 살고 싶은 나라가 한국입니다. 이 작은 나라에는 막대한 잠재력이 있고, 앞으로 더 발전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한국 국민은 어떤 나라 국민보다 특별합니다. 인정이 많은 한편, 위기극복 능력이 강합니다. 단일민족의 힘이라 생각합니다.” 


김창준 전 의원은?

1939년 서울 생. 1961년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 남가주대학에서 토목을 전공하고 ‘Jay Kim 엔지니어링’ 대표로서 성공해 1990년에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다이아몬드바시 시장에 오른다. 이후 1992~2000년까지 한국계 최초로 미국 공화당 연방하원의원에 내리 3선 당선됐다. 의원직을 마치고 지난 2011년부터 한국에서 김창준미래한미재단·정경아카데미를 운영하며 한미 우호 증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김상윤 기자 < ksy0609@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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