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_김창준 칼럼]경제기적 이룬 노인들의 현실
[김창준 칼럼]경제기적 이룬 노인들의 현실[뉴욕 중앙일보] | ||
|
| 미국의 유력지 워싱턴포스트는 지난 1월 23일자에 대한민국 노인들의 비참한 실태를 자세히 보도했다. 이 신문에 기사와 함께 실린 반 페이지 크기의 대형 사진은 허름한 포장마차에 5~6명의 노인이 둘러앉아 소주병과 안주 몇 접시를 앞에 놓고 담소하는 모습이다. 사진 밑에는 굵은 글씨로 '몇 백 년 내려온 전통적인 우리의 가족관계는 이제 다 무너졌으니 이제는 조용히 혼자 죽을 수밖에 없다'는 이들의 한숨 섞인 말을 소개했다. 한국이 어쩌다 이렇게 변했단 말인가. 동방예의지국이란 말은 사라진 지 오래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날카로워진 한국의 젊은이들에겐 늙은 부모를 모셔야 한다는 마음의 여유가 생길 수가 없다. 그보다는 그저 거추장스럽고 짜증만 나게 하는 존재로 생각하게 됐다. 심지어 법정에서 젊은 판사까지도 '늙으면 죽어야지'란 막말을 퍼붓는다. 과연 이들이 누구인가. 바로 오늘의 한국을 이처럼 잘 살게 만든 장본인들이다. 독일의 탄광 중동의 사막바람을 마다하지 않고 또 건설업에 목숨을 걸었던 '영웅들'이다. 이들은 이처럼 피땀을 흘려 돈을 벌면서도 자식들만은 자기네들이 겪은 고생을 시키지 않기 위해 자식 교육에 모든 열정을 쏟아 부었다. 그 덕분에 자식들은 배부르게 자라면서 부모보다 훨씬 더 크고 건강해졌다. 하지만 부모 세대는 자식들 뒷바라지 하느라 스스로의 노후대책을 준비하지 못하고 그만 일찍 늙어버렸다. 몸을 가누기 어렵게 되자 자식들이 가끔 들려 용돈이라도 몇 푼 집어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용돈은커녕 전화를 해도 귀찮아 하고 나중엔 아예 전화를 받지 않는다. 이처럼 자식으로부터 소식이 끊어진 지도 오래된 상황에서 죽기 전에 자식들의 목소리라도 한 번 들어봤으면 하는 소망 속에서 하루 하루 견딘다는 사람도 있다. 자식들이 부모님을 모시는 건 몇 천 년 내려온 한국의 전통이건만 아예 자식들한테 버림받은 이 불쌍한 노인들 오늘의 한국을 경제대국으로 만들어 놓은 영웅이라고 믿기엔 이들의 모습이 너무도 처량하다. 정부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는 말을 들었다. 내 부모를 정부가 책임지라는 건 결국 다른 사람들의 세금으로 내 부모를 모시란 뜻이다. 정부 정책에 의하면 정부에서 연금을 받는 노인은 전체의 3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 자식들의 무관심과 정부의 충분치 못한 노인복지 예산 때문에 삶에 찌든 노인들의 자살률이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에 제일 높은 것이 오늘날 한국의 현실이다. 워싱턴포스트 기사에서 올해 82세의 이병선이란 노인은 정문에 'X' 표시가 된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낡은 집에 네 식구가 함께 살면서 구호단체들이 제공한 전기담요에 의존해 겨울을 나고 있다고 말한다. 재향군인회에서 보내주는 연금과 정부의 보조금을 합쳐 한 달에 약 300달러로는 부족해서 궂은 일을 닥치는 대로 한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피곤한 줄 모르는 이유는 "치매로 고통 받는 아내보다 더 오래 살아서 부인을 돌봐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내가 먼저 죽으면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며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한국에서 이전 정부 때부터 내려온 노인정책에 따르면 자식이 있는 노인은 정부보조금을 받을 수 없다. 자식이 있어도 부모를 도울 능력이 없다는 증명서를 제출하면 정부보조금을 받을 수 있는데 많은 이는 자식을 잘못 키운 죄책감과 자존심 때문에 신청을 거부한다고 한다. 더 큰 이유는 이렇게 보고했다가 자식들이 혹시 불이익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다. 워싱턴포스트는 한국에서 수레를 끌면서 쓰레기통을 뒤지고 폐상자나 빈병을 주워 고물상에 넘겨 몇 푼 받는 노인들을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며 경제기적을 이뤘다는 한국의 어두운 면을 그대로 노출시킨 비참한 모습이라고 전했다. 앞서 소개된 이병선 노인은 "60년 전 한국이 찢어지게 가난했을 때 하루 세 끼를 어떻게 때우느냐가 걱정이었는데 이제 82세가 된 지금 다시 하루 세 끼를 걱정해야 한다"며 "하지만 자식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한 걸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힘 없이 말했다. 김창준 칼럼 전 연방하원의원 |
